
1700년대를 대표하는 수학자 중 단 한사람을 뽑으라면 오일러라고 얘기할 수 있다.
1800년대를 대표하는 수학자 중 단 한사람을 뽑으라면 단연 가우스이다. 수학사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구분은 가우스라 할 수 있다.
3대 수학자라고 하면 아르키메데스, 뉴턴, 그리고 가우스라 한다. 오늘은 '수학의 왕자' 가우스의 일생과 그의 업적에 대해 알아보자.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아 이런 것을 발견하였구나~' 정도로만 알면 된다. 그의 업적이 속속들이 다 이해간다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거든요.
1. 출생과 어린시절
1777년 4월 30일 독일 브룬스비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벽돌공인 노동자였고 평범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우스는 어릴 때부터 천재라 할 수 있다.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들이 있는데 일례로 벽돌공장에서 근로자들을 관리하던 아버지가 근로자들의 임금 명세를 보며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어린 가우스가 보다가 틀린 곳을 지적했다고 전한다. 그의 나이 세 살 때이다. 또 너무 유명한 얘기지만 또 하자면 10살 무렵, 담임이던 버트너선생님이 낸 수학문제 1+2+3+…+100의 합을 구하라는 문제를 단 번에 푼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어릴 적 일화 때문인지 가우스는 이런 농담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는 말을 할 수 있기 전부터 이미 계산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가우스는 1788년에는 오늘날의 중등과정이라 할 수 있는 Gymnasium에 입학하였으며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짐머만 교수는 따로 그를 지도함과 동시에 그를 칼 빌헬름 페르디난드 공작에게 소개시켜줬다. 공작은 그의 수학적 재능에 감명받아 이후 가우스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대학교육비 뿐만 아니라 15년 동안 줄곧 장학금을 지원했다.
2. 수학의 길
1792년 고등전문학교인 브룬스비크 Collegium Carolinum에 진학한다.3년 동안 재학한 Collegium에서 가우스는 그의 학문적 토대를 견실히 쌓았다. 행성의 거리에 관한 Bode의 법칙, 유리수 승수의 이항정리, 산술기하평균을 독립적으로 발견하였고, 보간법을 이용하여 √2 의 값을 소수점 아래 50 자리 수까지 계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수론에서 중요한 2차형식에 대한 상호법칙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유명한 수학자들이 50년동안 시도하였던 증명을 18세 생일 한 달 전에 논쟁의 종지부를 찍으며 증명을 완성한다.
1795년에는 브룬스비크를 떠나 괴팅겐 대학에 등록했다. 1798년엔 그는 정17각형을 작도하였는데, 이는 2000년 이상 수학자들을 괴롭힌 문제에 대해 가우스가 성공한 것이다. 그의 나이 18살일 때이다. 가우스는 어느 날 자와 컴퍼스만을 이용한 17각형 작도법을 발견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의 묘비에 17각형 작도법을 새겨 달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실제로는 묘비를 제작하는 석공이 “능력이 안 된다”며 새기지 못했다. 이 17각형 작도법을 계기로 가우스는 수학에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정했던 듯 하다.


정 17각형 작도. 그의 무덤엔 17각형이 새겨지진 않았으나 그의 동상 발 밑에 17각형을 상징하는 별모양이 있다.
1799년 22세가 되던 해에, 헬름슈테트 대학으로 옮겨 지도교수 J. F. Pfaff의 지도 하에
모든 n차 복소다항식은 n개의 복소근을 갖는다
라는 대수학의 기본정리를 증명하는 논문으로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이후엔 브룬스비크로 돌아와 수학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의 수학에 대한 결실은 1801년 출판된 ‘수론연구’(Disquisitiones Arithmeicae)에서 맺는다.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초기 수학자들의 연구는 물론 새로운 개념 및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17각형의 작도 방법, 이차 형식에 대한 새로운 요소, 소수의 분포, 모듈라 방정식, 산술의 기본 정리 등등 그의 초기 수학적 업적들이 망라되어 있다고 한다.


가우스의 학문적 고향인 독일 괴팅겐 시. 괴팅겐 대학
괴팅겐은 시 전체가 하나의 대학교로 구성된 대형 캠퍼스다. 전체 면적 117㎢에 인구 12만 여 명의 시민이 거주하지만, 40% 이상이 괴팅겐 대학교 학생들이다. 나머지 주민들 또한 괴팅겐 대학교와 관련한 직장을 가졌거나, 학문을 닦다 정착한 사람들로 구성된다.괴팅겐 대학교에서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노벨상 수상자만 무려 29명을 배출하였고 현재까지 괴팅겐 대학교의 총 노벨상 수상자는 44명에 이르며 이 중 이공계 출신이 40명이다.
사람들은 이를 '괴팅겐의 기적'이라 부른다.
이러한 '괴팅겐의 기적'의 토대 중 하나는 가우스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억측인걸까?

가우스가 직접 세운 천문대
3. 천문학자로서의 삶
가우스에게 있어 천문학과의 만남은 가우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801년 1월, 소행성 케레스(Ceres)가 이탈리아 천문학자 G. Piazzi에 의해 잠시 발견되었다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케레스의 위치를 찾는 것이 당시 과학계의 커다란 문제가 되었는데 당대 수학과 천문학의 대가들이 궤도추정의 계산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는 최소제곱을 이용한 수치근사법을 이용하여 케레스의 위치를 추정하였고, 그 해 12월 가우스의 추정지점에서 케레스가 재발견되었다. 이 놀라운 업적은 당시 과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 가우스는 자신의 방법을 공표하지는 않아 더욱 신비를 자아냈고, 가우스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등극하게 된다. 1809년에 가우스는 두 번째 저서인 ⌜천체 운동론⌟ (Theoria motus corporumcoelestium in sectionibus conicis Solemambientium) 을 출판하는데 여기에 비로소 행성의 궤도추정을 위한 계산이 소개되어 있다. 행성 궤도를 계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천체 연구 대가였던 피에르 라플라스(1749∼1827)는 가우스를 ‘세계 최고 수학자’라고 칭송했다. 이곳 천문대에서 40년 가까이 연구원 등으로 근무하다 퇴직했다는 악셀 비트만 씨(68)는 “가우스는 행성 궤도 계산으로 30세 때인 1807년 괴팅겐대 천문학과 교수 겸 천문대장에 임명되었고 평생 자리를 유지해 수학자보다는 천문학자로서 업적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 당시가 가우스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05년 가우스는 요한나 오스토프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1803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은 가우스 개인에게는 비극의 씨앗이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가우스의 후원자였던 페르디난트 공이 죽음을 맞이했다. 프로이센 고위사령관직을 맡아 전장을 지휘했던 페르디난트 공은 예나-아우어슈테트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가우스는 공작에게 바치는 애도의 시에서
전하는 다른 모든 책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고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나이다
라고 슬퍼하였다. 직장이 필요했던 가우스는 1807년 괴팅겐 대학의 천문관측소 소장으로 부임한다.
1809년 부인이 셋째를 출산한 후 죽으면서 외로움과 고통의 집안으로 변한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가우스는 또 다시 실의에 잠기고 우울증이 재발하였으나, 재혼을 결심하고 전처의 절친한 친구 민나 발덱과 1년도 되지 않아 결혼하였으나 이후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 측지학, 전자기학, 기하학
1) 측지학과 미분기하
가우스는 1818년에 들면서 약 10년간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의 과학인 측지학 및 곡면에 관한 연구를 다루는 미분기하학의 이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820년~1850년경에 걸쳐서 정부의 측지 관계의 학술 고문을 맡아, 측량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한편, 미분기하에 관한 주요 연구는 <논평집>의 '곡면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1827)'에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적분 기술을 이용한 가우스 곡률을 소개하였다.
2) 전자기학
그가 독자적으로 전자기학에 대해 연구하던 중 과학협의회 '자연 연구자들의 모임'을 위해 3주간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젊은 물리학자 빌헬름 베버를 만나게 된다. 이때의 만남을 인연으로 가우스와 베버는 7년 동안 많은 성과물을 탄생시켰다.
주요업적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하나만 뽑으라면 가우스 법칙으로 알려진 원리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가우스의 전자기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해 지금도 자기유도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가우스(G)’가 사용되고 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니... 천재 중의 천재라 할 수 있다.
3) 비유클리드 기하학
1800년 초기부터 가우스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존재 가능성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수학계는 다섯 개의 명제로 이루어진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을 공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다섯 번째 평행공리는
주어진 직선 l 상에 놓여있지 않는 한 점을 지나 l에 평행인 직선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
이다. 가우스는 이에 대해 의심을 품고 새로운 공리를 생각해낸다. 오늘날 쌍곡공리로 불리는 가우스의 새로운 공리는 쌍곡평면(Hyperbolic Plane, Poincare Disc) 상에서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 보다 작다는 것을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쌍곡기하학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가우스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그의 사후 1860년이 되어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아직은 비유클리드기하학을 발표하기엔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으로 판단해서 많은 비판에 직면할 것을 우려해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5. 죽음
가우스는 생전에 치장도 별로 하지 않고 소탈하게 살았으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도 않았다고 한다. 연구논문도 많이 쓰는 것보다 ‘양은 적지만 성숙하게(Pauca sed matura)’를 모토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후배나 동료들이 연구 업적을 발표하면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우기고 후배들을 격려하기보다는 깔아뭉개는 경우가 많아 후배 양성에는 인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류 최고의 수학자 중 한명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85년 2월 23일, 가우스는 77세를 일기로 괴팅겐의 자택에서 잠을 자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망 후 하노버왕 조지 5세가 그에게 지름 70mm 메달을 증정했다.

"mathematicorum principi" 사실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겠다. 독일어인지 라틴어인지....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수학의 왕자에게
자료출처
[이만근 교수와 함께 수학의 고향을 찾아서]<9> 가우스 동아일보 2012-05-16 03:00
박헌정 「가우스가 들려주는 근삿값과 오차 이야기」 주 자음과 모음 2009.
『달콤한 수학사3』 마이클 j. 브래들리 안수진 옮김 일출봉 2007
황승수 「수학의 황제 가우스 서거 100년」 대한수학회소식 100호 2005년 3월호
네이버 지식백과 가우스 (naver.com)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2469&docId=1621041&categoryId=42469
이상 부산+김해 (정시+수리논술) 씨앤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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