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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배우는 모든 이들의 스승 레온하르트 오일러(1707~1783)

by 부산센텀 허선생 2026. 1. 24.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는

“오일러를 읽어라, 오일러를 읽어라. 그는 우리의 스승이다”

라고 외쳤다. 그만큼 오일러가 현대 수학에 끼친 영향은 막강하다. 오늘은 그의 생애와 일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업적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첫번째 이유로는 업적을 몇가지로 간추리기 힘들 정도로 방대하기도 하고, 두번째 이유로는 내가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당신이 생각하는 수학의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면 된다.

1. 생애

1)출생과 어린시절

1707년 4월 15일 스위스의 바젤에서 신교 목사인 폴 오일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2) 바젤대학 시절

바젤대학교

1720년 13살에 오일러는 바젤 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당시 바젤 대학에는‘베르누이 방정식’으로 유명한 야콥 베르누이(1654∼1705)의 동생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1667∼1748)라는 유럽 최고의 수학자가 있었다. 요한 베르누이와 오일러의 아버지는 대학을 같이 다닌 친구 사이로, 자연스럽게 오일러는 베르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 베르누이는 이미 어린 오일러에게서 뛰어난 수학적 능력을 발견하고,개인적으로 수학에 대해서 지도하기도 했다.

오일러는 1723년 철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후, 아버지는 그가 신학 공부를 계속하기를 바랬지만 이미 오일러는 수학에 깊이 빠져있던 상태였다. 결국은 요한 베르누이의 설득으로 오일러는 수학을 전공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요한 베르누이가 인정하였으니 아버지가 오일러를 반대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이후 요한 베르누이의 지도와 더불어 요한베르누이의 아들인 다니엘 베르누이, 니콜라스 베르누이와도 일생동안 우정을 나누게 된다.

1726년 바젤 대학에서의 공부를 끝마친 뒤 파리 아카데미에서 수상도 하고 음향학에 관한 고전적 논문을 써서 바젤 대학 물리학과 교수에 응모하였으나, 나이가 어린 탓에 채용되지 못했다. 이 당시 오일러는 19살의 나이였다.

더 읽을만한글: 수학계의 로열패밀리 베르누이 가(1)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3)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172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세계 3대 박물관이라고 한다.

1727년 먼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있던 베르누이 형제의 추천으로 오일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당시 러시아는 선진 유럽을 배우고자 많은 뛰어난 학자들을 파격적인 대우로 불러모을 때였다. 참고로 수학부가 아닌 의학부 쪽에 직을 얻어 간 것이다.

1730년에 그는 정식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의 물리학부 교수가 되었다. 23살의 나이에 교수가 된 것이다. 이후 1733년에는 수학부 학부장이 되었다.

173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스위스 출신 화가의 딸인 카타리나 겔(Katharina Gsell)과 결혼했다. 생전에 그들은 아이를 13명이나 낳

았으나, 5명만이 제대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1735년 동료 수학자들이 몇 주일에 걸쳐 끙끙댄 프랑스과학원이 낸 수학 문제를 3일 만에 풀다가 과로로 심한 열병으로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가 살아났으나, 결국 1738년에는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는 왼쪽 얼굴 부분만을 강조해 보여주는 것이 많다.

4)베를린 시절

1741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옮겼다. 프리드리히 2세 대제는 그를 아주 융숭히 대접하였고, 오일러는 매우 만족해 하였다.

1744년 공식적으로 베를린에 프로이센 학술원이 생기면서, 오일러는 수학부 부장을 맡았다. 당시 학술원 원장은 프랑스 출신의 수학자이자 자연철학자 모페르티우스(Pierre Louis Maupertius, 1698∼1759)였는데, 오일러는 원장이 자리를 비울 때에는 원장 대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다행히 둘은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오일러는 수학부말고도 천문대와 식물원의 감독과 학술원의 인사와 예산 문제, 그리고 학술원의 도서 및 출판 업무의 감독에도 관여했다. 또한 왕으로부터 지도 수정, 펌프 개발 등의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요청받아 수행하기도 했으며, 정부가 관여하는 복권, 보험, 연금, 포병 문제에도 조언하였다.

1759년 학술원 원장을 맡고 있던 모페르티우스가 죽자 오일러는 자신이 그 자리를 맡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프랑스 풍에 심취한 프리드리히 2세 대왕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에게 원장직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달랑베르는 이를 거부하고 베를린에 오지 않았지만, 왕은 오일러를 학술원 원장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오일러는 베를린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 학술원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5)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1766~

1766년 오일러를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러들였다.

177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오일러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겨우 목숨과 원고 일부만을 살릴 수 있었다. 이 화재로 오일러는 왼쪽 눈마저 시력을 잃어 완전 실명했으나, 오히려 더 왕성한 연구 업적을 이루었다. 완전히 실명한 다음 그는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면서, 광학, 대수학, 달 운동에 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거의 절반에 이르는 연구 업적을 이루어 냈다.

6)죽음

1783년 9월 18일 오일러는 칠판 앞에서 열기구의 상승 운동과 최근에 발견된 천왕성의 궤도에 대한 계산을 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3시간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날에도 오전에는 팽창하는 풍선의 팽창 속도를 계산했으며, 오후에는 새로 발견된 행성인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다. 저녁 식사 후 손자를 보며 잠시 쉬다가 갑자기 심장마비가 오자 석판에 “나는 죽는다”고 쓰고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생애와 그가 쓴 글을 비교해보면 연평균 800쪽의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수학자들 중에 이보다 많이 글을 쓴 이는 없다. 그는 조용하지만 열정적이었고, 선한 사람이며, 겸손한 사람으로 현재에도 기억되고 있다.


오일러에 관한 글을 쓰는데 빠질 수 없는 얘기가 있어 여기에 적는다. 1988년 미국 수학 잡지 ‘(Mathematical Intelligencer)’는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학 공식을 뽑는 것이었다. 2년에 걸친 치열한 접전 끝에 최종 선정된 식은 바로 다음과 같이 ‘오일러 항등식’이었다.

이 공식을 보는 수학자들의 심리는 마치 아름다운 예술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상태와 비슷하다고 한다.

참조: 수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리(수학일반)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2. 일화

오일러와 관련해서는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일화들이 있다. 몇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또 독수리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무슨 문제든) 아무 힘을 들이지 않고 계산을 해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프랑수아 아라고(1786∼1853)가 자신보다 한 세대 전의 스위스 천재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1707∼1783)에 대해 한 말이다.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1부터 시작해서 100까지 각 수의 6제곱수를 하나하나 암산해 세어나가다 그것이 끝나면 각 수의 6제곱수를 처음부터 모두 더하는 계산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한다.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세 권이나 되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몽땅 암송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일러는 1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한 손에는 갓난아이를 안고 다른 아이들이 자신의 발 밑에서 놀 때 논문을 적을 정도였다.

러시아 예카테리나 1세 여왕의 초청으로 고향 바젤을 떠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활동하던 1771년, 고향 마을에 대화재가 나서 서재에 있는 자료들이 모두 불타 버렸다. 하지만 자료가 모두 없어졌는데도 더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이는 그의 자료가 모두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또 있다. 옛 프로이센의 수도이자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고향이기도 한 쾨니히스베르크(제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로 바뀜) 주민들이 그를 찾아와 “쾨니히스베르크에는 프레골랴 강이 흐르는데 이 강에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이 섬 주변에 7개의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거치는 방법이 있을까”라고 물었다. 오일러는 문제를 보자마자 “불가능하다”는 답을 내렸다. 그 유명한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이다.

 

 

이상 부산+김해 (정시+수리논술) 씨앤씨였습니다.

 

지동표 「현대 수학의 기원과 토대」 지식의 지평 2007 p.296~311

[이만근 교수와 함께 수학의 고향을 찾아서]수학 문제를 3일 만에 풀다 오른쪽 눈 실명 (donga.com)

동아일보 입력 2012-05-11 구자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