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공부하다보면 베르누이라는 이름이 여기저기 나온다.
그렇지만 베르누이라 해서 다 같은 베르누이가 아니다?
베르누이가는 3대에 걸쳐 뛰어난 수학자를 8명이나 배출한 집안이며 수학사에서 매우 유명한 가문이다.
이 중 제일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요한 베르누이를 중심으로 해서 요한의 큰 형 야콥 베르누이, 요한의 아들 다니엘 베르누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1667년 8월 6일 ~ 1748년 1월 1일)
1. 최단강하곡선(brachistochrone)에 관한 일화
이번엔 출생부터가 아닌 요한 베르누이가 전유럽에 유명해진 계기가 된 일화부터 소개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1696년 6월, 유럽전역에 있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에게 요한베르누이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실린 편지를 보낸다.
높이가 다른 두 점 A,B를 이어서 공을 굴렸을 때 가장 짧은시간동안
이동하게하는 곡선은 무엇인가?

그림출처 최속강하곡선 네이버 수학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40694&cid=60207&categoryId=60207
편지 말미에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 문제를 통해 우리는 어린아이와 어른을 가려낼 것이다. 정답을 맞히면 영원한 명성을 얻을 것이다."
이 편지는 온 유럽의 수학자에게 전해졌다. 먼저 첫번째 정답자는 라이프니츠였다. 요한 베르누이는 라이프니츠의 친구이자 제자(라이프니츠가 1646년생이니깐 요한베르누이가 21살 어리다)로써 미적분 우선권 논쟁에서 라이프니츠를 지지하였다. 이런 그가 이 문제를 낸 이유는 다른 수학자들을 평가하기 위함은 물론 특히 아이작뉴턴이 미적분을 정말로 잘 아는지 떠보기 위해 보내진 것이다. 이에 열이 받은 뉴턴이 요한 베르누이가 2주가 걸린 문제를 편지를 받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하루동안 풀어서 익명으로 "나는 외국인한테 놀림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I do not love to be dunned and teased by foreigners)"라고 보냈고 이를 받은 요한베르누이는 "사자는 발톱만 보아도 알 수 있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문제의 답은 이제 너무도 유명해져서 수학에 관심이 있는 누구라도 답을 알고 있다. 바로 "사이클로이드 곡선"이다.

그림출처: 「사이클로이드」『네이버캐스트 수학산책』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7607&cid=58944&categoryId=58970
사이클로이드 곡선의 방정식을 유도하는 것은 쉽다. 그렇지만 이 사이클로이드 곡선이 왜 최단강하곡선이 되는지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사이클로이드 곡선에 관해선 다음을 참조. https://blog.naver.com/kshzoa1/221821425326
2. 출생
본래 베르누이 가문은 현재는 벨기에 땅이지만 당시에는 네덜란드에 속했던 안트베르펜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칼뱅주의를 믿었다. 그런데 16세기 말 칼뱅파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158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스위스 바젤에 정착했다.바젤에서 베르누이 가문은 가장 오래된 상인 집안과 혼인을 맺고 상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손대대로 상인의 딸과 결혼해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베르누이 가문의 수학자 계보에서 처음 등장한 니콜라우스도 향신료를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이어서 그의 자녀 중에서 걸출한 수학자가 두명 탄생했다. 바로 야곱과 요한이다.


3. 생애
처음에 아버지는 가업을 이어가길 바랬으나 상업에는 소질이 없었고 그래서 의학을 공부하기를 바랬으며 23세에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그러다 독일의 수학 잡지 <학술기요>에 실린 독일의 수학자 고트프리트라이프니츠의 논문을 읽고 미적분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수학자로 진로를 바꾼 야곱과 요한은 라이프니츠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1690년에는 세 사람이 연구팀을 결성해 함께 미적분학을 연구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는 아들들의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린다.
그뒤로 형은 바젤대학의 수학교수로 가게 되나 아직 어렸던 요한은 1690년부터 파리에 유학하여 로피탈 후작에게 미적분학을 강의했는데,후일 로피탈은 요한에게 매년 300프랑의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모든 수학적 발상을 로피탈 자신에게만 이야기하고 사본을 남기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다. 로피탈은 1696년 베르누이의 연구 결과를 모아 무한소해석을 발간했는데,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로피탈의 정리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즉 로피탈의 정리는 로피탈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요한 베르누이의 작품이라는 사실!
아무튼 이 책은 당대 수학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요한 베르누이는 알게 모르게 배가 많이 아팠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한 베르누이가 매우 질투심많은 성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이 로피탈과의 관계에서 온 상처가 요한 베르누이로 하여금 평생동안 '최초'와 '명성'에 집착하는 성격으로 굳어지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아닐까 짐작된다. 형 야콥 베르누이와도 대표적으로 최단강하곡선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고, 또 아들 다니엘 베르누이의 연구업적을 놓고서도 싸우는 바보 아빠가 되었다.

<그로닝겐에 있는 그로닝거미술관. 유명하단다>
요한은 Drothea Falkner와 결혼하고 그의 어린 아들(생후 7개월)과 함께 1695년에 네덜란드 그로닝겐('흐로닝엔'이라고 적혀있음)으로 돌아오게 된다.그로닝겐에 머물며 그의 형 야곱과 수학적 난전을 벌인다. 요한 베르누이는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형이 사망한 뒤에야 바젤대학에 초빙되었다(1705). 형의 죽음보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된 것을 기뻐했다고 전해지니 그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글의 흐름과 관계없지만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하나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바로 '오일러'이다. 요한 베르누이는 아들보다도 더 오일러를 챙긴 듯 하다. 그와의 인연은 다음을 참조하시라.
수학을 배우는 모든 이들의 스승 레온하르트 오일러(1707~1783)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는 “오일러를 읽어라, 오일러를 읽어...
blog.naver.com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자료를 뒤져봐도 알기가 힘들었다. 칼럼의 말로 그의 인생을 마무리 한다.
He was known as the "Archimedes of his age" and this is indeed inscribed data-on his tombstone.
Article by: J J O'Connor and E F Robertson
이상 부산+김해 (정시+수리논술) 씨앤씨였습니다.

출처
「서양수학사에 한 획을 그은 수학의 명가 베르누이 가문」,『과학동아』 http://dl.dongascience.com/magazine/view/M201412N011
「사이클로이드, 최단강하곡선(Brachistochrone) - 요한 베르누이의 빛의 성질을 이용한 풀이(2)」 작성자 공돌이씨https://blog.naver.com/lyb0684/221182447820
「움직이는 세계 미적분」,『문명과 수학 4편』, EBS 다큐프라임 2011.
「서울과학고 김국인 쌤의 재미난 수학세계 - 수학의 大명문가 ‘베르누이 가족’」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5051546461
「Johann Bernoulli」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ArchiveO’Connor, John J.; Robertson, Edmund F. (September 1998).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http://mathshistory.st-andrews.ac.uk/Biographies/Bernoulli_Johan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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