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을 다룬 뒤에 라이프니츠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전공은 법학이지만 철학사에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으며, 20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수학에 심취하여 이진법은 물론 미적분까지 발견한 위대한 천재이다.
10대 시절에 이미 수학을 공부하였다고는 하나 깊이있게 수학을 접한 것이 20대 중반부터임에도 위대한 발견을 하였다니. 천재가 아닐 수 없다.
그에 대해 알아보자.

1. 출생
라이프치히에서 1646년에 출생. 뉴턴보다 4년 늦게 태어났다. 뉴턴보다 4살 어린 동생인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삼대째 계속 작센 정부에서 일해 온 집 안 출신의 철학 교수였다.

2. 생애
1661년 15세 때, 라이프찌히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1663년 17세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666년 ‘결합술에 관한 논고'로 알트도르프 대학 철학박사 학위.
1672년~1676년 파리 및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 이 시기는 라이프니츠의 개인적인 수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루이 14세로 하여금 이집트를 원정하도록 설득하려는 외교적 목적을 띄고 파리를 방문. 파리에서 1676년까지 체류하게 된다.
라이프니츠의 외교적 사명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그는 이 시기에 니콜라스 르몽드, 호이겐스, 아노, 말브랑슈, 올덴부르크, 보일 및 뉴턴 등등과 같은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는 이 시기 동안 학자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자신이 물리학과 수학에 무지함을 깨닫고 특히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네덜란드의 호이겐스로부터 수학을 배웠다. 이 기간동안 세계 최초의 사칙연산이 가능한 계산기까지 발명한다. 이 계기로 영국 왕립협회의 외국인 회원이 된다.

라이프니츠가 발명한 최초의 사칙연산이 가능한 계산기
1676년 30세에 하노버 요한 프리드리히 공(公)의 궁중 고문관으로 초청받아 하노버에 오게 된다. 이후 40여년간 하노버에 머물며 하노버 공의 일을 도우는 한편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쌓아가게 된다. 라이프니츠의 흔적이 제일 많이 남아있는 도시는 하노버이다.


하노버대학은 라이프니츠의 탄생 360년을 맞은 2006년부터 학교명을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대학’으로 바꾸었다.
1831년 개교한 이 대학은 그동안 그냥 하노버대학으로 불렸다.

폭격당한 교회건물과 복원된 라이프니츠의 집. 독일 하노버 시내에 있는 에기디엔 교회(왼쪽). 14세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1943년 폭격으로 파괴된 이래 일부러 복구하지 않은 모습으로 보존하고 있다. 하노버를 대표하는 사상가 라이프니츠를 기리기 위해 세운 라이프니츠 하우스(오른쪽). 이 곳은 라이프니츠가 1698년부터 17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1981~83년 다른 장소에 전면만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다. 현재는 하노버대학의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다.
3. 죽음
1714년 하노버 공작이 영국왕 조지1세로 등극하여 영국으로 갈 때 라이프니츠는 영국으로 같이 가길 원하였으나 뉴턴과의 미적분 논쟁으로 영국과 껄끄러운 사이가 된 라이프니츠는 그대로 하노버에 남겨졌다. 이후 쓸쓸히 1716년 고향 라이프치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당대 천재로 불리던 라이프니츠는 그의 명성과 걸맞지 않게 그의 장례식엔 하인 한명만이 따랐을 뿐이라 전해진다.
현재 라이프니츠의 무덤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요한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4. 미적분 논쟁
1674년 라이프니츠가 미적분 개념을 영국 왕립협회에 보고. 왕립협회는 같은 개념이 뉴턴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라이프니츠에게 알린다.
1684년 그렇지만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미적분법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발표.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접선 및 최대값과 최솟값을 찾는 새로운 방법, 이 방법은 분수 또는 무리수에 의해 제약받지 않으며, 이것을 위한 뛰어난 계산법>
"뉴턴 경이 이 원리를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라도 모든 걸 한 번에 발표할 수는 없고, 한 사람이 한 가지의 기여를 하면 다른 사람도 다른 것에 기여하고 그러는 것이다"
즉 뉴턴이 미적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알지만 최초발표는 "나야 나!"
1687년 뉴턴이 미적분이 깔려있는 프린키피아 출간하며
뉴턴은 프린키피아 초판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라이프니츠의 발견은 말과 기호만 다를뿐 나의 방법과 거의 같다."
이를 보면 미적분에 관한 논문은 라이프니츠가 먼저 발표하였기 때문에 라이프니츠가 먼저 미적분을 발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전에 라이프니츠는 1676년 뉴턴과의 서신을 통해 미분법에 대해 뉴턴에게 도움받은 적도 있다. 라이프니츠의 논문과 뉴턴의 책이 잇따라 출간되면서 미적분에 대한 논쟁이 당시에 있긴 하였으나 뉴턴이 나서기 꺼려했다는 설로 인해 어쨌든 미적분 우선권을 둘러싼 악명높은 논쟁은 다음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1699년 논쟁은 15년 뒤 스위스 수학자 드 듀이에(De Dulier)가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은 뉴턴의 것을 도용한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불거짐
1705년 라이프니츠는 뉴턴이야말로 도용자라고 발표하여 논쟁이 폭발
이에 옥스포드 대학의 수학자 존 케일(John Keill; 1671-1721)이 크게 분개하며 강경하게 비난
그러자 라이프니츠가 크게 반발하여 1711년 이 문제를 영국왕립협회에게 존 케일이 공개적인 사과를 하도록 요청
1712년 이른 봄, 왕립 학회는 그 학회가 소장한 이 문제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조사하기위해 11명의 위원을 임명함으로써 라이프니츠의 항의에 응답했다. 결국 영국왕립협회는 미적분의 최초발견자는 '뉴턴'이라고 정함으로써 뉴턴이 승리자가 되었다. (당시 영국왕립협회장이 뉴턴이었던 것은 아이러니)
이후 100여년 간 라이프니츠파와 뉴턴파를 넘어 수학이 영국파와 대륙파로 나뉘게 된다. 영국은 라이프니츠의 표기법을 무시한 탓에 수학발전이 이후 늦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820년 두 사람 모두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견한 것으로 공인됨으로 일단락된다.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에 남긴 의의는 유명해서 간략하게만 남긴다. 라이프니츠의 독창성은 바로 그 표기법에 있다.
다음을 비교해 보라.

뉴턴이 dot notation을 썼다면 라이프니츠는 오늘날 미적분에서 사용되는 여러기호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기호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 표기법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수학사에서 크기 때문이다.
오늘날 쓰고 있는 적분기호도 마찬가지이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처음에 omn는 라이프니츠가 ‘합’을 나타내기 위해 라틴어 ‘summa’의 첫 글자 문자 S를 길게 늘인 꼴인 현재의 적분기호 이 나오기 전에 잠시 사용했던 기호이다.

이렇듯 오늘날 미적분을 공부함에 있어 우리는 라이프니츠에게 빚을 진 것이 많다.
그렇지만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었다.
바로 '무한소'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라이프니츠식 표기의 보편성과 편리성으로 인해 이후 라이프니츠의 후예들은 무한소 계산법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그 결과가 물리적으로 타당하고 유용하였으므로 논리적으로 엄밀하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시한채 무한소 계산법을 발전시켰다.
이는 이후 해석학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된다.
수학에 엄밀함의 물결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는 다음 기회에~!
(다음 글 참조)
극한에 대한 엄밀한 접근(1)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극한에 대한 엄밀한 접근(1)
이 알쓸신수 시리즈는 【중고등학생이 알아두면 쓸데가 있을까말까한 신박한 수학사전】을 말한다. 그러니 ...
blog.naver.com
참고
「이론을 실천한 라이프니츠…하노버는 이 천재를 그리워했다」, 『한겨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76881.html
「이만근 교수와 함께 수학의 고향을 찾아서]<7> 뉴턴과 라이프니츠」,『동아일보』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20509/46100124/1
뉴튼과 라이프니쯔의 미적분학에 대한 역사적 고찰 = The historical investigation on calculus of Newton and Leibn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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