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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뉴스&교육 철학

자연철학의 거인 뉴턴

by 부산센텀 허선생 2026. 2. 5.

뉴턴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새로운 법칙들을 발견하였다고 스스로 평가하였으나 그 또한 자연과학의 거인이었다.

 
1. 출생
 
 
뉴턴은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100년 뒤 그리고 갈릴레오가 사망하던 
1642년 12월 25일(당시 사용되던 율리우스력에 따름,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에
링컨셔 지역의 울즈소프(Woolsthorpe)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영국은 막 청교도혁명(1642)이 일어났던 혼란한 시기였으며, 
우리나라는 조선 인조 20년 때였고, 병자호란(1636)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잉글랜드 링컨셔>

<울즈소프에 있는 뉴턴의 생가>

<울즈소프에 있는 뉴턴의 사과나무. 사실 뉴턴의 사과나무는 1820년에 베어졌고 지금 있는 나무는 다시 심은 것이라 한다.>
 
2. 생애

1642년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남. 뉴턴은 귀족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농부의 자식은 아니었고 재산은 풍족한 가운데 태어났다.  3년 후에는 어머니가 나이 많은 목사와 재혼하여 집을 떠나 버렸다. 뉴턴은 외가에 맡겨졌다. 
뉴턴이 열 살이 되었을 때, 계부가 사망했고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명의 자식을 거느리고 울즈소프 장원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이별로 인해 뉴턴의 성격이 괴팍하다는 글들은 많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믿거나 말거나.1644년(?) 울즈소프 근처에 있는 킹즈스쿨(King's School) 입학 뉴턴은 공부를 좋아하였으나 처음부터 비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대학에 가서 새로운 학문을 접하면서 급속하게 학문에 눈을 뜬 케이스이다.
 
1661년 6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 뉴턴은 농부가 될 뻔 하였다. 
어머니는 그가 공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농장일을 하기를 원하였으나 그의 외삼촌이 어머니를 설득시켜 대학에 가게 된다.
 

<트리니티 칼리지. 다윈도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전체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졸업생이 60명인데 이 중에서 트리니티 칼리지 졸업생이 33명이나 된다고 한다

 
1664∼66년 페스트(흑사병)가 유럽에 크게 유행하자 대학이 일시 폐쇄 되어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사색과 실험으로 보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때 싹트게 된 것이라고 하며, 사과 의 일화도 이때 있었던 일이다. 
1667년  페스트가 진정되어 대학에 돌아 와 이 대학의 fellow(특별연구원)가 되고 이듬해에는 전임특별연구원가 됨과 동시 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668년  오목 거울로 빛을 집광시켜서 볼 수 있는 최초의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다. 이후 반사 망원경을 만든 공로로 왕립협회 회원이 된다. 1669년 I.배로의 뒤를 이어 루카스좌 수학교수직에 부임하였다.  1672년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1687년 프린키피아 초판 출판<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의 줄임말

 
프린키피아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만 알아보자

 

                제1권은 ‘물체의 운동’, 
                제2권은 ‘저항이 있는 공간에서의 물체의 운동’, 
                제3권은 ‘수학적으로 본 세계의 체계’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1688년 대학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1년간 런던에 체재했다 1699년  조폐국장이 되었다. 위조화폐 를 단속하며 핼리, 로크와 함께 몬터규의 화폐 재주조사업을 도왔다.  동전 둘레를 보면 톱니바퀴 모양이 있는데 이는 뉴턴이 제안한 것이다.
그전에 톱니바퀴가 없을 때는 은화의 테두리를 얇게 깍아내어 부당이득을 취한 이들이 많았었는데 이를 단속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뉴턴이 경제에 참여한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주식투자까지 하였으나 말아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한 말은 유명하다.

 
              “천체의 움직임은 센티미터 단위까지 측정할 수 있는데 주식 시장에서 인간들의 광기는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다”
 
1701년 10월 루카스교수직, 트리니티 칼리지의 이사직을 사임했다. 1703년 영국 왕립회의 의장 선출  1704년 <광학> 발표
 
3. 죽음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1727년 3월 방광담석으로 고생하다가 3월 19일 의식을 잃고 이튿날 새벽 한 시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

<런던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뉴턴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그 곳>

 
4. 업적
 
 뉴턴의 업적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광학, 미적분의 발견, 만유인력의 법칙을 포함한 운동법칙.
 이 중에서 다 다루기엔 나의 뇌용량이 부족한 관계로 미적분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하자. 
 뉴턴 이전의 수학은 정적인 학문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만을 수학의 연구대상이었다.
 적분만 하더라도 아이디어는 이미 기원전 아르키메데스에 의해 제시되었다고 인정받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다루는 것이 쉬운가, 움직이는 물체를 다루는 것이 쉬운가.
 당연하게도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연구하는 것이 쉽고 따라서 적분이 먼저 발전되어왔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촉발된 과학혁명으로 인해 움직이는 천체 및 물체에 대한 수학적 원리가 필요해졌고
 이는 뉴턴과 같은 천재 과학자이자 수학자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게 된다.
 
 미적분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드디어 움직이는 물체가 수학의 대상으로 놓여지게 된 것이다. 
 
 뉴턴이 미적분에서 물리학에서 다루는 절대가치, 즉 "시간"을 독립변수로 하여 시간에 따른 물체의 움직임을 분석하였던 것은 물리학자로써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뉴턴이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천체운동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 미적분학은 이를 분석하는 강력한 도구였던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접선을 구하는 과정에서 미분을 발견하였던 것과는 대조된다. 
 
(라이프니츠와의 논쟁은 여기 참조)
https://blog.naver.com/kshzoa1/221723239678

팔방미인 라이프니츠(1646년 ~ 1716년)

뉴턴을 다룬 뒤에 라이프니츠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전공은 법학이지만 철학사에서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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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 과학자에겐 자연현상은 관찰의 대상일 뿐 증명의 대상이 아니었다. 
뉴턴의 위대함은 수학의 영역을 정적인 대상을 벗어나 변화화는 세계를 이해하는 원리를 제시한 데 있다. 
 미적분과 관련된 저서는 다음과 같다. 
 1665년 무한소의 개념에 기초하여 미분법을 발견하고 유율법(流率法)의 개념을 확립했다. 
 1669년 《무한급수의 방정식에 의한 해석에 관하여》를, 71년 《유율법과 무한급수》를 저술했다. 
 그리고 프린키피아의 높은 수학적 완성도는 바로 미적분의 공헌 때문이다.
 


 

 
 
 
 
 
 
 
 

참고
「운동 역학의 설계자 아이작 뉴턴」,  『공부하고 싶은 사람만 읽는 인물 과학사』 
http://topclass.chosun.com/topp/view.asp?idx=219&Newsnumb=201908219&utm_source=dable
「미적분의 발견」,  『수학산책 네이버캐스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2769&cid=58944&categoryId=58970